목회자칼럼: 우리를 치셨으나 (욥기 13:13~28)

  욥은 더 이상 어리석은 친구들과의 무익한 논쟁을 그치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자신의 고난을 호소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결심은 욥에게는 죽음을 각오한 결심이었습니다. 15절의 ‘여호와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하는 고백은‘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그 외에는 내게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없이 끔찍한 고난을 당하는 욥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요 심히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더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여기에 욥의 믿음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로부터 돌이키기 위해서 치시는 징계성 고난, 나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주시는 연단성 고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는 영광성(?) 고난은 이해가 되는 고난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은 이유를 알고 목적을 알기에 힘들지만 버텨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이 있습니다. 욥의 고난과 같은 고난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의 갈등은 심각합니다. 고난을 막을 수 있음에도 허락하시는 하나님, 얼마든지 도와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경만 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 믿고 의지하기에는 불안한 하나님,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러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소연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24).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과연 그러한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2:3).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고 단 한순간도 욥을 자신의 원수로 여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변함없이 그를 온전하고 정직하며 이 세상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이유로 인하여 잠시 고난을 허락하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욥기 42장에서 모든 고난을 갑절의 축복으로 역전시켜 주십니다.

  오늘도 고난의 깊은 밤을 외롭게 견뎌내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고난을 이해하려 하시기 보다는 고난을 버텨내는 믿음을 간구하십시다. 다윗은 광야에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버텼고 요셉은 감옥에서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수억의 성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 아니겠습니까?

  자꾸 흔들리는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사랑합니다. 이번 한 주도 굳건히 버텨내십시오, 우리를 도로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