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칼럼: 형통인가 박해인가 (디모데후서 3:10~17)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말씀합니다(1). 지금 우리는 말세의 끝자락인 말세지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말세의 때에 사람들은 더욱 악해질 것이요 (2~5)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12)는 바울의 경고는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 39:23; 29:2; 왕하 18:7; 1:3).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12). 그렇다면 열심히 믿고자 하는 우리가 누릴 것은 형통입니까 박해입니까?

  우리 주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형통)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10:29~30). 곧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형통과 박해를 함께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곧 박해도 형통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이요 박해도 형통이라는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박해도 형통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5:10~11)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의를 위한 박해는 하늘의 큰 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형통인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는 박해(고난)를 통해서 평안할 때에 경험하지 못했던 주님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구원을 증거합니다(11). 주님은 박해와 고난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때로 친히 우리를 건져내어 주십니다. 평안할 때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은혜의 체험들과 응답들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는 것, 바로 이것이 형통입니다. 

  화창한 샌디에고의 날씨는 늘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해줍니다. 그러나 때로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늘 평안하기만 한 신앙 생활은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고 감사를 잃게 만들고 기도가 식어져 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아픔과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를 깨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로 인해 평안할 때에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것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