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칼럼: 성찬(Communion)의 의미

  사실 성찬의 문제는 먹는 문제와 연관될 수 있습니다. 성찬은 무언가를 먹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먹는 것과 관련한   성찬의 배경에 대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성찬 시행의  배경을 구약성경에서 발견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고전 10:3~4). 원래 성찬은 언약적 식사 혹은 유월절 식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24:11). , 이스라엘은 출애굽 시절에 이미 성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성찬은 일종의 유토피아적 식사를 선취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 당시가 배고픈 시절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귀족과 엘리트가 아닌 이상 배부르게 먹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예배 중에 먹는 예식을 제정하셨을까?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복음서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유일한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흘러 넘칠 정도로 풍요로운 유토피아적 식사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유토피아적 식사에 대한 풍부한 전통이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25:6). 또한 메시아의 잔치인 에녹 162:1~11도 종말에 있을 유토피아적 식사를 묘사합니다. 또한 유대인들 가운데 첫 번째 구속자(모세)  광야에서 백성에게 만나를 주었던 것과 같이 마지막 구속자(메시아)도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그의 백성에게 제공할 것이라는   메시아 기대 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찬이 종말의 유토피아적인 식사를 선취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찬 때 먹는 빵과 포도주는 영양학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뿐더러 정말로 식사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성찬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성찬의 영적인 의미만을 생각합니다. 사실 영적인 의미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으며,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에 근거하여 산다는 것을 되새깁니다. 성찬을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런 성찬의 전통적인 이해를 잘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울러 예수님이 왜 굳이 먹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이루신 구원을 되새기고 기념하기를 원하셨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언약적 의미 이외에 정말로 식사 그 자체였으며, 종말의 유토피아적 식사의 흘러 넘치는 풍성함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찬중에서 김규섭 교수(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