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칼럼: 의심의 웃음에서 감사의 웃음으로

(창세기 17:15~27)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이어서 '나의 공주'라는 뜻을 가진 사래에게 '모든 나라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사라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대로 모든 나라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됩니다. 남이 불러주는 이름이 아닌, 내가 부르는 이름이 아닌, 하나님이 불러 주신 이름이 바로 진정한 나임을 기억하십시다.

 

  그런데 사라가 누구입니까? 자기 몸종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하고는 질투심이 만발해서 하갈을 쫓아낸 인물 아닙니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까지 바꿔가면서 사라를 열방의 어머니로 만드십니다. 우리 역시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까? 그 질문의 답은 주님이 아시고 우리 각자가 압니다. 그저 우리 같은 자들에게 베푸신 은혜, 감사할뿐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민족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웃습니다. 의심의 웃음입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도저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는 것은 90, 100세 된 늙은 부부의 모습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웃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하는 타협안을 제안합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과 보이는 현실 중 어느 것을 믿을 것이냐 하는 갈등은 우리도 매일 매일 겪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보이는 현실은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지금도 보이는 현실은 보이지 않는 말씀이 붙들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1:3)). 보이는 현실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할 말씀은 (5:18) 결코 의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타협의 대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고 말씀 그대로 선포하고 말씀 그대로 기도할 때에 그 말씀이 현실을 다스립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말씀이 현실을 바꿉니다! 보이는 현실보다 그 현실을 다스리는 말씀을 택하시기를, 그래서 의심의 웃음이 아닌 감사의 웃음을 활짝 웃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