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유다의 중보 (창세기 44:14~34)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던 길에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의 은잔이 발견됩니다. 좇아온 요셉의 청지기는 베냐민만 잡아 갈테니 형들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형들이 위기에 빠진 이복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챙기는가 알고자 했던 요셉의 시험이었지요.

그런데 형들은 베냐민을 홀로 보내지 않고 함께 요셉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베냐민의 잘못을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요셉에게 고백합니다. 그뿐입니까? 그가 받을 벌을 자신들도 함께 받아 모두 요셉의 노예가 되겠다고 합니다!  20년 만의 회개 후에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형들의 모습은 요셉과 우리 모두에게 감동입니다. 

우리는 형제들 중에 누가 잘못한 자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뒤에서 수근거립니다. 앞에서는 아무 소리 못하고 뒤에서 지적질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함께 마음 아파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 기도할 때에는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그 사람의 아픔이 내게 느껴져야 합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해서 중보할 때에는 나도 그 죄로 인해 함께 애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12:15). 이것이 중보의 원칙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중보자가 많은 공동체가 함께 헤쳐나가지 못할 고난과 시험은 없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를 이간질하고 흩어 놓을 세력은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종이 되겠다는 유다의 제의를 요셉이 거절하자 유다는 자신을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게 하고 베냐민은 아버지에게 돌려 보내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다의 희생적 결단과 형제의 우애로 그들은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만일 유다와 형들이 베냐민을 애굽에 놔둔채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야곱의 가족이 요셉과 감격적으로 상봉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담보로 잡혀 베냐민과 아버지를 살리려 하는 유다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 우리를 살려주신 주님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정죄하고 하나님께 고소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보혈로 변호해 주시고 중보해 주십니다. 마음이 낙심될 때마다 우리의 변호사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분을 본받아 우리도 가족과 공동체를 위한 중보자가 되십시다.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그의 죄로 인한 애통함을 나의 애통함으로 받아들이십시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이를 사랑할 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