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칼럼: '함께 울려면' (사무엘하 19:1~8)    

  사무엘하 19장부터는 다윗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이제야 하나님이 부과하신 죄값을 다 치른 셈입니다.  이제는 속히 애통에서 벗어나 나라를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를 못합니다. 그의 슬픔으로 인해 반란군을 정복한 승리의 분위기가 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개선해야 할 군사들이 마치 패잔병처럼 가만히 돌아옵니다.

  이에 요압이 나서서 왕에게 조언을 합니다. 그의 의도는 왕을 다시 일어서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잘못된 조언으로 인해 다윗과 그의 관계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갈등의 관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는 슬픔에 잠겨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조언을 해야 할까요?

  요압에게서 배워야 할 첫번째 조언자의 자세는 슬픔을 겪는 자와 충분히 공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공감 대신에 다윗의 슬픔으로 인해 자신이 왕자를 죽인 불충한 자로 잘못 곡해되고 있음을 항의합니다. 요압의 항의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압살롬을 직접 죽임으로 이스라엘을 동족 상쟁에서 건진 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다 넓은 사람이었고 충성된 사람이었다면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에 공감을 했어야 했습니다. 때로 논리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입니다. 특별히 상대가 애통이나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에는 더 이상 논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 않기에 그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감정을 어루만질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의 감정을 함께 느껴주는 공감입니다. 기억하십시다. 기쁨은 함께 나눌수록 배로 늘어나지만 슬픔은 함께 나눌수록 배로 줄어든다는 것을…

  요압에게서 배워야 할 두번째 조언자의 자세는 겸손입니다. 다혈질인 요압은 다윗의 애통함을  참지 못하고 왕의 집, 곧 그의 사적인 공간을 무례히 찾아가 자신들은 왕실의 존속을 ‘구원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윗을 구원한 분은 하나님이시요 요압은 그분의 도구에 불과하지요). 이어서 다윗의 애도가 자신들을 모욕하며 멸시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요압은 다윗이 일어나 나가서 부하들을 위로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의 옆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 맹세까지 하며 위협합니다. 신하로서의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발언입니다.

  위로자요 조언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하고 배려깊은 자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문제를 겪을 때에는 쉽게 답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이 문제를 겪을 때에는 우리 역시 많이 힘들어 합니다. 많은 경우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을 알아도 그 정답대로 살아내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답을 제시하려고 하기 이전에 그분에게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나눠 주어야 합니다. 그 힘은 그 분을 향한 사랑이요 배려요 응원이요 격려요 기도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답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가능한 본인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지혜롭게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주위에 생각보다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공유하고 나아가 그분들이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랑과 배려와 응원과 격려와 기도를 나눠 주시는 보람있는 하루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