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은혜의 색다른 계산법

매년 봄이면 나는 스포츠 아나운서들 말로 ‘3월병’ 환자가 된다. 64개 대학 농구팀의 토너먼크 끝에 열리는 미국 대학 체육협회 선수권 결승전을 보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 경기는 매번 18세의 어린 학생이 1초를 남겨 두고 자유투 라인에 서 있는 장면으로 귀착되는 것 같다.

그는 불안한 듯이 드리블을 한다. 이 두 번의 자유투를 놓치면 학교의 놀림감, ()의 놀림감이 된다는 것을 본인도 안다. 이십 년이 지나도 이 순간을 재현하며 정신 치료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 반면 슛이 성공하면 대번에 영웅이 된다. 사진이 신문 1면을 장식한다. 그는 아마 주지사로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드리블이 계속된다. 상대팀에서 기를 죽이려 작전 타임을 부른다. 그 선수는 자신의 앞날을 저울질하며 사이드라인에 서 있다. 팀 선수들이 격려자 어깨를 쳐 주지만 아무도 입은 열지 않는다.

어느 해던가 한번은 그 선수가 막 슛을 던지려는데 전화가 와서 잠깐 방을 나간 적이 있다. 선수는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왼쪽 무릎을 떨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만 명의 관중이 그 선수의 주의를 흐려 놓으려고 고함을 지르며 깃발과 손수건을 흔들어 댔다.

통화가 예상보다 길어져 한참 후 돌아와 보니 화면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 선수가 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하고는 농구 네트를 찢으며 팀 선수들의 어깨에 올라 타 있지 않은가. 세상에 아무 걱정도 없었다. 환한 웃음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이 두 정지 화면 – 한 선수가 자유투 라인에 구부리고 서 있는 장면과 바로 그 선수가 이번에는 친구들의 어깨에 올라 타서 기뻐하는 장면 -이 내게는 비은혜와 은혜의 차이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세상은 비은혜로 움직인다. 모든 일이 나 하기에 달려 있다. 어떻게든 슛을 넣어야 한다.

예수님의 나라는 우리를 다른 길로 부른다. 그 길의 터는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그분이 하신 일에 있다. 우리는 성취해 내야 한다는 부담이 없이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값비싼 승리는 그분이 이미 우리를 위해 얻어 놓으셨다.

이 두 화면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걱정스런 의문이 하나 생긴다. 나의 신앙 생활은 두 장면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IVP)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