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따를 만한 분’ |
말씀이 끝날 즈음엔 그 많던 군중들도 하나둘 흩어지고 고작 열두명만 남아 있었다(요 6:66~67). 예수님은 대중들의 시선을 끄는 일 따위는 눈곱 만큼의 관심도 없으셨다.
이건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이자면 군중들이 흔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수준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이들이 떠나갔지만 주님은 숫자에 연연하지
않으셨다. 대신 급진적인 메시지를 믿고 따르는 몇몇에게 집중하셨다. 그리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그 소수를 사용하셔서 역사의 물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셨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출석 교인
수와 규모, 예배당의 크기로 성공을 가늠하는 이 시대의 교회 문화 앞에 서 있었다. 교회가 으뜸으로 여기는 일들을 예수님은 쳐다보지도 않으셨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물음이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교인들이 다 도망갈 만큼 과격한 말씀을 하셔도 군말
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두 번째는 조금 더 까다로웠다. “예수님께 순종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상황이
가장 겁난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분께 철저하게 순종하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안주하지는 않을까 두렵고도 두렵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며 그분을 직접 만났던 대다수의 군중이 보였던 것과 똑 같은 반응을 나 역시 보이게 될까 봐 몹시 두렵고
떨린다. 이 책을 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나는 나그네 길을 가는 중이다. 이 길은 비단 목회자들만 가는 길은 아니다.
이러한 질문은 대형 교회의 교인 모두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많은 이들이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전파하는 복음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치관과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좌우간 선택해야 할 때가 되었다. 교회든 그리스도인이든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을 토대로 성공을 추구하고 삶을 향유하면서 지금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다. 혹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정직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분을 진정으로 믿고 따를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담대하게 묻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여러분도 내가 가는 길에 동행이 되어 주면 좋겠다.
내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해결책보다는
도리어 문제점이 더 많은 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밝히신 대로 그분이 하나님이며 성경대로 주님의
약속에 한 점의 오류도 없음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철저하게 외면하셨던 오늘날의 문화의 잣대들로 삶의 만족과
교회의 성공을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래디컬(Radical)’ (두란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