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기도의 크기를 키우라

먼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인공 느헤미야가 살았던 시대의 간단한 역사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기원전 586년경 유다 왕국은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고스란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러나 바벨론이 망한 뒤 포로로 끌려 간 유대 사람들은 마침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가 기원전 536년이다. 스룹바벨이라는 지도자를 따라 돌아온 1차 귀환자들은 약 5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주위 이웃 민족들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무너진 성전 재건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근 80년 뒤인 기원전 458년에 에스라가 두 번째 유대인 집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향한다. 에스라가 도착해 보니 먼저 와 있던 유대인 귀환자들이 성전을 재건해 놓기는 했지만, 그 후손들이 다시 주위의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민족들과 혼인하며 말할 수 없는 타락과 부패,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에 에스라는 자기 민족이 처한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한 데 있다고 판단하고, 백성들을 다 모아놓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율법서를 낭독한다, 하나님의 사람 에스라는 70여 년간의 포로 생활로 잊혀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가르쳐 자기 민족이 철저한 회개로 인한 부흥과 회복을 체험케 하기 위하여 평생 노력한 사람이었다.

에스라의 리더십 아래 영적 부흥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주위의 수 많은 반대자들의 견제로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당시 중동 지역의 성들은 돌로 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보초를 세운 성문은 성을 출입하려는 모든 자들을 살펴 출입을 통제하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성의 지도자들은 성문에 모여 모든 도시의 업무를 처리하고, 나라의 문제들을 재판하기도 했다. 성벽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보호벽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 나라에 정치적인 자주권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할아버지 시대 때 바벨론의 침략을 맞아 예루살렘 성벽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1차 귀환 때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유대인들도 상벽 재건에는 실패했다. 그만큼 반대자들의 견제가 극심했던 것이다.

포로 생활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성벽이 없는 예루살렘에 살았던 까닭에, 아직도 집 없는 아이처럼 주위 민족들의 무시와 천대를 받았고, 빈번한 공격에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위 이방 민족들이 성벽을 쌓으려고만 하면 와서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죽이는 통에 공사가 진척되질 못했다. 성벽이 굳건히 세워져야 해방된 자주 독립 국가의 위상을 온 천하에 알릴 수 있고, 자신들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그런데 성벽이 없으니까 노상 적들이 와서 마을을 불 지르고 재물을 훔쳐가고 하는 통에 농사도 제대로 못 짓고, 하나님께 예배도 제대로 못 드리는, 한마디로 불안하고 힘든 삶을 간신히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라가 돌아온 후 12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이때 이 불쌍한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전혀 뜻밖의 곳에서 온다.

              

              ‘세상 중심에 서다’ (두란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