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1장 루이빌 사역

때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던 꿈도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만 하면 현실로 나타나는 법이다. 1873-1879

시대적 배경

[1장은 심슨의 삶에 있어 방향 정립의 계기가 되었던 루이빌 시절을 다룬다. 심슨의 메시지, 그의 사역, 그가 시작한 무브먼트 어느 하나를 막론하고 루이빌 시절에 그 뿌리를 두지 않은 것이 없다. 심슨도 역시 산물이었다. 심슨과 그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당시의 시대적 배경부터 고찰하겠다.]

심슨이 루이빌로 향했던 1873년의 미국은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남북전쟁(1861-65)이 끝났다고는 하나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처와 분노로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250만 명의 젊은이들이 남과 북의 명분을 걸고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려갔던 내전이 끝났기는 했으나, 참전자중 4분의 1이 귀향치 못하고 전장의 이슬로 쓰러져 갔던 뼈아픈 상처가 아직도 아물기는커녕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옥의 불길처럼 이글거리던 고통의 세월이었다.

내전에 패한 남부의 재건문제는 승리자인 북부의 가혹한 요구조건 때문에 암초에 부딪쳤다. 역사의 비극적인 교훈이 여기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쟁에 이기기는 쉬워도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극히 어렵다.” 북부연합을 이끌었던 링컨 대통령은 관대한 아량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님북전쟁직후 암살 당했고 권력의 진공상태에 나셨던 북부의 자칭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부에 보복해야 한다고 나섰던 것이다. 남부는 남부대로 분쟁 속에 휘말려 들었다. 대다수의 남부는 남부군의 영웅 로버트 리 장군을 추종하였으나 일부는 쿠클락스 클랜의 창설자인 나단 포리스트를 따르기로 결정함으로 남부도 두 세력으로 갈라졌던 대립과 분쟁의 시대였다.

이러한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 직면해서 기독교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화해와 안정에 기여했어야 마땅했지만 현신은 그렇지 못했다! 남부군과 북부군을 막론하고 10여만 명의 젊은이들이 전투의 와중에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와 영적으로 깨어지는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터의 참혹한 현실가운데서 젊은이들이 기도의 눈물을 뿌리는 와중에서도 정작 교계의 지도자들은 서로 상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서로간에 불신과 증오의 불길을 부채질하기에 바빴던 한심한 시대였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이 닥칠 때마다 자문해 보는 말은 인간에게 소망이 있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인간의 분노를 초월하여 역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다.

첫째는, 남북전쟁 직전 소수의 뉴욕의 사업가들이 시작한 정오의 기도회에서 시작된 평신도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은 활발히 진행되어 전쟁 중에도 무수한 교회에 영향을 끼쳤고 꺼져가던 신앙의 불꽃을 다시금 타오르게 하였다. (계속)

 

C&MA를 통한 백년이상의 하나님역사 (C&MA 한인총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