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1장 루이빌 사역 시대적 배경

둘째는, 윌리엄 보드맨(1810-86)이 성결(Sanctification)을 주제로 1858년 저술한 성결의 삶”(Higher Christian Life)이 성결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 책은 폭발적 수요에 힘입어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였다. 1875년만 해도 출판사 한군데서 6만 부가 판매되었다고 하니 그 인기와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세 번째로 중요한 사건은 무명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1837-99)와 아이라 샌키(1840-1908) 두 사람이 1873년 영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던 사건이다. 1873년 그 해가 저물기도 전에 무디-샌키 팀이 시작한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 전역을 부흥의 불길로 덮혀버렸다. 2년 동안의 영국체류기간동안 무디-샌키 팀은 3백만 이상의 사람들에게 복음과 찬양으로 은혜를 전파하였다. 2년 후 귀국하자 두 사람은 미국인들에게 영웅대우를 받았고 그들이 즉시 시작한 대형전도집회는 19세기후반 미국 기독교계를 부흥의 불길로 휩쓸게 된다. 이 부흥운동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첫째는 일개 교회가 아닌 대규모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형전도집회이며, 둘째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성결운동이다. 이 두 가지 부흥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남북전쟁의 영적 폐허를 재건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젊은 캐나다출신 목사 한 분이 국경을 넘어 남부 캔터키주 소재 교회로 향한다. 이 때만 해도 자신이 미국을 휩쓸 영적 대각성 운동에 얼마나 큰 역할을 감당할지 이 젊은 목사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1873년 늦은 겨울 새 사역지를 향해 미국 남부 향 기차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젊은 캐나다출신 목사 심슨의 눈에는 모든 것이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어느 모로 보나 심슨은 승리자의 면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심슨의 걸을 걸이는 당당하나 품위를 잃지 않았고 파리하나 강인한 인상과 사려 깊은 눈매는 나이에 비해 성숙함을 풍기어서 누구나 보기만 해도 신뢰감을 가질만했다.

면모에서 드러나는 성품은 심슨의 삶 속에서도 입증되었다. 약관 30세에 심슨 목사는 고향인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이미 성공적인 목회를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은 선지자가 드문데 심슨은 이 면에서도 전례를 깨뜨렸던 것이다. 그는 1865년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온타리오 주 해밀턴 시의 녹스 교회에 원목으로 추빙을 받고 부임하였다. 당시 녹스 교회는 캐나다에서 장로교회로는 두 번째로 큰 건물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교회는 침체하여 성전의 4분의 1만 채우던 교회였다. 그러나 심슨이 8년 반 동안 사역하면서 녹스 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체험했다. 심슨이 녹스 교회의 사역을 뒤로 하고 두 번째 사역지를 향해 캔터키 주 루이빌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 가졌던 고별예배에는 성전이 비좁아 500명의 성도들이 입당을 못할 정도였다. 심슨의 녹스 교회 사역을 대변하는 자료가 있다. 첫째, 양적 성장이다. 심슨 재임 중 750명 교인이 증가하였다. 둘째, 심슨의 능력에 대한 현지 신문의 평가이다. “탁월한 설교 능력, 다양한 재능, 성공적인 목회 이 세 가지 분야에서 심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계속)

 

C&MA를 통한 백년이상의 하나님역사 (C&MA 한인총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