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1장 루이빌 사역 시대적 배경 (2)

심슨의 성공적인 목회를 뒷받침한 다른 하나의 큰 자산은 루이빌 향 기차에 함께 몸을 실은 매력적인 사모 마가렛 여사와 세 자녀였다. 1미터 50센티의 작은 키에 발랄한 성격의 마가렛은 심슨의 해밀턴 사역에 사모로서 적극 내조하였고 심슨이 우리빌로 사역지를 옮기는 결정에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두 아들, 알버트 헨리와 제임스 고든 헤밀턴, 이제 돌이 갓 지난 마벨 제인의 재롱으로 루이빌로 가는 긴 여로도 그들에게는 즐겁지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헤밀턴 목회의 성공으로 자신만만했던 심슨은 187312월 루이빌에서의 목회의 전망은 그저 희망적이기만 했다.

루이빌의 체스넛스트릿 장로교회에서 심슨을 초빙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다. 루이빌에 부임하기 두 달 전 심슨 목사는 뉴욕에서 열린 모임에 참여하러 왔다가 뉴욕소재 한 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마침 동일한 목적으로 뉴욕을 방문했던 체스넛스트릿 장로교회의 교우 몇 분이 심슨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루이빌로 돌아가는 즉시 당시 공석이던 원목자리에 심슨 목사를 초빙하도록 강력히 건의 했다. 이들의 건의에 따라 당회에서 조사한 결과 심슨이 뛰어난 설교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목회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심슨을 선호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심슨은 미국인이 아니고 캐나다인이기 때문에 당시 북부 장로교단에 소속되었던 체스넛스트릿 장로교회와 루이빌에 있는 다른 교회와의 갈등을 무마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루이빌은 퇴근 끝난 남북전쟁의 여파로 갈등과 반목이 상존했던 도시였다.

루이빌의 체스넛스트릿 장로교회 외에도 심슨 목사를 청빙하려던 교회가 또 있었다. 1873123일 해밀턴 교회의 당회에는 체스넛스트릿 장로교회 외에도 다른 교회의 청빙서가 제출되었으나, 심슨 목사는 캐나다 소재의 교회를 택하지 않고 미국 루이빌 소재의 체스넛스트릿 장로교회를 택했던 것이다. 해밀턴 교회의 당회는 마지못해 심슨의 이임을 승인하였다.

역사의 아이로니이다. 심슨 목사가 선택을 하기 전에 루이빌을 방문하고 그 곳이 얼마나 분쟁으로 가득 찬 곳인지 알았더라면 어떻게 하였을 까? 아마도 심슨은 자신의 거취에 대해 재고하였을 것이며 어쩌면 루이빌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슨의 인생에 펼쳐지는 사건들을 고려해 보면 심슨의 선택은 지극히 옳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숨겨진 문제들

 

제반 여건으로 미루어 보아 심슨 목사의 루이빌 사역의 앞날은 밝기만 해 보였다. 헤밀턴 시절보다 더 큰 사역도 가능해 보였고 루이빌로 그를 초빙했던 성도들도 심슨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심슨 본인은 두 가지 남모르는 문제들을 부여안고 고통 당하고 있었다. 때로는 이 문제들이 너무 심각해서 심슨과 그의 사역에 암운을 드리웠다.

(계속)

 

C&MA를 통한 백년이상의 하나님역사 (C&MA 한인총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