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1장 루이빌 사역 성전신축과 갈등표출(2)


현재 체스넛스트릿 장로교회의 성전은 650석밖에 되지 않아 그동안 급속도록 증가한 교우 수를 감당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다 앞으로도 계속될 전도집회를 통해 교우 수는 더욱 증가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막상 휴가를 다녀오고 나니 교회의 지도자들과 심슨 간에 성전신축과 관련한 의견출돌이 노골화했다. 심슨은 후일 루이빌에서의 체험에 대해 회고하며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루이빌의 사역은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제게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소득은 성령세례의 체험을 통해 지금까지 제가 생각했던 교회사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역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대형 전도집회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틀에 박힌 장로교회에서 사역하며 이 열망을 실현시키려 무한히 애썼고 실제 어느 정도 성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배타주의와 틀에 박힌 고루한 방법론에 묶여 속수무책인 경우도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더 이상 체스넛스트릿 장로교회에 연연할 때가 아님을 깨달은 심슨은 떠날 것을 결심했다. 그 시기가 마침 1875년 성전신축과 관련해서 왔을 뿐이다.

성전신축 프로젝트가 발표되자 18천 불의 헌금이 즉시 들어왔고 변화가에 있는 건물 신축부지도 즉시 매입하게 되었다. 심슨 목사는 이에 관련하여 세 가지를 제안했다: (1) 건물은 단순한 구조로 짓되 많은 인원을 수용하여야 하고: (2) 건축비는 65천 불 내지 7만 불로 제한하며: (3) 당장 교우증가를 감안하여 9개월 이내에 입주 가능하도록 건축하자. 그러나 심슨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건축비는 105천 불 규모로 늘리고 완공하는데 2년 이상이 걸리는 화려하고 멋진 건축물을 짓기로 교회가 결절했던 것이다.

 

                       더 넓은 곳을 향하여

심슨이 루이빌을 떠나 더 넓은 곳을 향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이에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1877년 뉴욕주 왓킨스글랜에서 겅도들의 건퍼런스”(Believers’ Conference)가 개최되었는데 심슨 목사도 육신적, 영적 재충전을 위해 이 모임에 참석허였다. 모임의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보다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나?”였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주제가 있었다. 강사들마다 강조한 것은 선교의 절대적 필요성이었다. 루이빌에서의 부흥집회이후 소외되었던 일반 대중들을 향한 전도의 열정으로 타올랐던 심슨 목사는 이 집회를 통해 그 소외되었던 일반 대중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세계선교에 대한 부담감이 심슨을 주장하게 되었다. 왓킨스글랜의 모임 후 시카고에 들러 친구들을 방문하던 중, 심슨은 시간을 따로 내어 이 문제에 대해 상고하고 기도했다. 선교에 대한 부담감은 심슨의 자신의 과거의 추억까지 회상하게 만들었다. 심슨은 탄생부터 선교사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1843년 심슨은 태어나는 즉시 당시 캐나다 최초의 선교사로 사우스시 아일랜드(South Sea Islands)로 파송되어 가던 길에 방문한 죤 게디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로 헌신된 몸이었기 때문이다. (계속)

 C&MA를 통한 백년이상의 하나님역사 (C&MA 한인총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