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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 칼럼: ‘제1장 루이빌 사역’ – 더 넓은 곳을 향하여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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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반대로 선교사로 가지는 못했지만 마냥 앉아서 마음으로 선교를 해야 한다고 동의만
하고 있기에는 심슨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너무 뜨거웠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선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가? 심슨은 우선 유럽과 북미출신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조사했다. 당시 선교의 개척자로는 영국출신 데이빗 리빙스턴(1813-73), 헛슨 테일러(1832-1905)와 메리 스렛서(1848-1915), 미국출신 아도나이람 젓슨(1788-1850),
캐나다출신 죠나단 고포스와 로살린더 고포스 부부 등을 들 수 있다. 바로 이들의
사역에 힘입어 1800년대는 “위대한 세계선교의 18세기”가 되었다. 캐나다인들이 헛슨 테일러와 아도나이람
젓슨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의 개척자로 손꼽는 죤 게디는 바로 심슨 출생 직후 세례를 주고 심슨을 선교사로 헌신시킨 장본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특정 선교단체나 개인이 피차간의 활동에 대해 무지한 가운데 선교가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낭비가 있었다. 이에 착안하여 심슨은 전 세계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사역내용들을 수집해서 선교잡지를 만들되 사진과 삽화를 곁들인 잡지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슨이 자문한 사람들은 모두 이런 잡지를 만들 가능성도 현실성도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주저앉을 심슨이 아니었다. 심슨은 곧 혼자 힘으로 선교잡지 프로젝트를 시작하고야 말았다. 이 프로젝트가 심슨의 삶에 끼친 영향은 심각했다.
심슨의 미래 청사진에도 큰 부분을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항상 그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가뜩이나 연약했던 육신을 망가뜨린 주범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심슨의 선교잡지가 성취한
업적은 대단하였다. 에일대학 선교학 교수 할란 비치박사는 후일 이렇게 평가했다. “심슨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심슨은 선교잡지를 만들되 사진과 삽화를 곁들인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므로 이 부분에 시계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우리를 박차고 다시 루이빌 성전 건으로 화제를 돌리자.
1878년 6월 9일은 신축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린 날이었다. 무려 3천명 성도들이 루이빌의 브로드웨이
성전에 운집하여 성대한 예배를 드렸지만 심슨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명분도 없는 신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전신축으로 인해 교회가 엄청난 빚더미 위에 앉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슨은
헌당식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교회 빚이 청산되기 전에는 월급도 받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교우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 저렴한 비용의 대중용 성전을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그들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다만 일단 신축된 성전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첫 예배에서 분명히 하였다.
“교회건물은 어떤 디자인으로 지어졌던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가지 존립목적에 따라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갈 곳 없는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계속) C&MA를 통한 백년이상의
하나님역사 (C&MA 한인총회)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