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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 칼럼: ‘우리는 예배자로 부름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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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된 위험한 시대에 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로 등을 토닥거리며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축할 때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거의 모든 것을 다 갖추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예배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책망하며 호소하고 계십니다(3:17,
19). ‘네게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할 것이 없다 하나…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저는 현재, 복음주의적이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그리그도를 공경하는 교회에 저의 충성과 책임을 다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급속히 발전하여 큰 교회들도 짓고 교인들도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자랑하며 부흥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과연 어떠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폴 사르트르가 자기는 세속화된 교회를 떠나기 위해 철학과 절망적인 상태로 돌아서게 되었다고 고백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즈음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 속에는 내 영혼을 기다려
주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나는 창조주를 필요로 하는데, 그들은
내게 거대한 조직체를 운영하는 대실업가를 소개해 주었을 뿐입니다!” 우리 중에는 우리가 주변 공동체나 지역 사회에 어떤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신경이라도 쓰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고백은 하지만 실제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지 못할 때는 말입니다. 근본주의자요 “정통”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그 동안 진리를 위해 용감히 싸우는 투사라는 뜻에서 “호랑이”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양손에는 자유주의자들을 때려 눕힐 때 사용했던 격투용 무기들
때문에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만이 상실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진리를 옹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필요할 때는 그 신앙을 위해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과 대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격투용 무기로 그들의
머리를 한방 날리는 것보다 오히려 진짜 그리스도같이 될 때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계속)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예배자 (생명의 말씀사) |